[영화 리뷰] 넷플릭스 영화 ‘승부’ 후기

1. 영화 ‘승부’, 단순한 바둑 이야기를 넘어서다.

영화 《승부》는 바둑이라는 다소 정적인 소재를 다루지만, 그 속에는 인물 간의 감정, 갈등, 성장, 화해가 숨 가쁘게 흘러간다. 실존 인물인 조훈현이창호, 두 바둑 천재의 대결을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 영화라기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응시하는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고 느꼈다.

나는 처음 이 영화를 보러 갔을 때, 바둑 규칙조차 제대로 모르는 상태였다. 어릴때 바둑을 배우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 그 룰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바둑에 문외한인 누구도 영화를 보는데 지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엔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승부에서 비롯된 감정이라기보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도전하고, 결국 이해하게 되는 복잡한 인간관계의 여운이었다. 누구보다 오래된 스승과 제자 관계에서, 오랜 왕좌를 제자에게 내주고 내려와야 하는 스승의 복잡한 심경을 이병헌 배우가 누구보다 잘 풀어낸 것 같다.


2. 스승과 제자의 첫 만남 — 말보다 더 많은 것이 오가는 시선

영화는 어린 이세돌이 이창호의 경기를 TV로 보며 감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장면은 단순히 ‘존경’이라는 단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다. 이창호에게 조훈현은 넘을 수 없는 벽이자, 언젠가는 꼭 뛰어넘고 싶은 존재였을 것이다.

스승이 제자의 미래를 읽어내고, 제자가 스승의 세계에 도전하는 이 구조는 익숙한 듯 보이지만, 《승부》는 그 속에 삶 전체를 바둑처럼 응축시켜 놓는다. 특히 둘이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서의 긴장감은 숨을 멈추게 한다. 말은 적지만, 눈빛 속에는 수많은 감정의 수읽기가 오간다. 스승과 제자, 천재와 천재, 인간과 인간. 그들은 바둑판 앞에서 모든 정체성을 맞대고 앉는다.

3. 바둑판 위의 전쟁 —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흐르는 감정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이창호가 처음으로 공식 대국에서 조훈현과 맞붙는 순간이다.
그 둘만을 비추는 카메라, 낮게 깔린 호흡, 바둑알이 놓일 때마다 울리는 하는 소리. 이병헌 배우와 유아인 배우의 연기가 보던 이들의 호흡을 멈추게 할 만큼 명징하게 다가왔다.

관객인 나조차도 이기고 지는 문제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걸린 감정의 무게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창호는 반항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스승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창호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말없이 내려다보는 수는 차갑고 완벽하지만 동시에 지독히도 외롭다.

이 영화가 탁월한 점은, 그 둘의 충돌을 승패가 아닌 감정의 파형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누구의 손이 흔들렸는지, 누구의 눈동자가 먼저 피했는지, 관객은 아주 미세한 단서들로 인물의 내면을 읽게 된다.

4. 이창호는 누구와 싸우고 있었을까

이창호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늘 ‘누군가보다 잘해야만’ 인정받는 환경에 있었다.
영화는 이창호가 이기고 싶어 하는 이유가 단순한 승부욕 때문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어떤 장면에서는 그가 대국을 마치고 나와 무표정하게 벽에 기대 있는 모습이 나온다.
카메라는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비추기만 하는데,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치열하게 자신을 다그쳤던 마음의 소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의 승리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증명이었고, 그의 패배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심리적 긴장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고조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스승 조훈현을 완전히 넘어서기 위한 마지막 대국에 이른다.

5. 스승이라는 자리의 고독

조훈현은 영화 내내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큰 목소리로 들렸다.

그는 바둑이라는 세계에서 누구보다 성공했고, 무너지지 않는 기사로 불렸다.
하지만 그 성공은 동시에 감정의 벽을 세우는 고립의 시간이기도 했다.

제자의 성장을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는 두려움을 느끼고, 지도자로서 존엄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진 그는 결국 스스로를 내면 깊이 밀어넣은 인물이다.

영화의 마지막 대국이 끝난 후, 조훈현이 남긴 짧은 한마디와 묵묵히 뒤돌아서 걷는 장면은 그 어떤 대사보다 강한 감정의 잔상을 남긴다. 그 장면에서 나는 그가 결국 이창호를 인정했고, 동시에 그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려 했던
스승으로서의 품위를 봤다.

6.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승부’는 무엇일까

영화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와 싸우고 있었지?” 이기고 지는 건 숫자로 남지만, 그 안에 숨겨진 감정들은 기록되지 않는다.

영화《승부》는 관객에게 그렇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싸움에서 정말 이기고 싶은 것은 ‘상대’인가, 아니면 ‘자신’인가.

우리 삶 속에는 수많은 바둑판이 있다. 직장에서도, 가족 안에서도, 사랑에서도 우리는 늘 ‘승부’를 벌인다. 하지만 그 승부는 항상 승패로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성장하기 위해 바둑을 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7. 영화 ‘승부’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울림

영화 《승부》는 단순히 스포츠 영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끝까지 자신의 수를 두는 것이 가증 중요한 태도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내 일상에서 ‘지켜야 할 수’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됐다. 관계 속에서 양보할 줄 아는 수,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수, 때로는 패배를 인정하고 다음 수를 준비하는 태도. 그 모든 게 바둑판 위에서뿐 아니라
내 인생에서도 유효한 ‘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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