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터를 켜라’를 다시 보다.
2002년 개봉작인 영화 ‘라이터를 켜라’는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입소문으로 회자되는 명작 코미디 중 하나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그저 웃겼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별별 캐릭터들이 엉뚱한 이유로 엮이면서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사건들이 정신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그저 웃긴 영화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사회에 대한 은근한 풍자,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숨어 있었다.
1. 라이터 하나 때문에 벌어진 ‘하룻밤의 대소동’
영화의 배경은 서울의 한 헌책방과 지하철, 그리고 우중충한 밤거리. 모든 사건은 오직 라이터 하나 때문에 시작된다. 희대의 캐릭터, 병구’(김승우)는 지하철에서 전단지를 돌리며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단 하나. 한 개비의 담배를 피우기 위한 라이터.
라이터가 없다는 이유로 전단지 돌리는 게 더 짜증났고, 그 짜증이 누군가의 멱살을 잡게 만들었고,
그 멱살이 다른 사람의 싸움으로 연결되며, 작디작은 ‘라이터 하나’가 하루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설정만 놓고 보면 너무 억지스럽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바로 그 억지스러움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가장 사소한 이유로 인생이 꼬이는 순간들. 우린 누구나 그런 날이 있지 않았던가.
2. 캐릭터의 향연, 각자도생의 웃픈 초상
‘라이터를 켜라’의 진짜 재미는 개성 강한 캐릭터들에 있다. 병구를 시작으로, 정장을 입고 헌책방을 찾는 수상한 중년 남자(차승원), 화장실만 찾다가 일탈하는 수험생(김민선), 알고 보면 애처가인 깡패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휘말린 시민들까지. 이 영화는 단 한 명의 ‘정상적인 캐릭터’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비정상성 속에, 우리는 너무나 현실적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차승원이 연기한 책방 손님 캐릭터. 처음엔 진지한 듯하다가, 이내 허둥지둥하면서도 어디선가 인생의 쓴맛을 안 듯한 깊이가 느껴졌다. 그의 말투, 시선, 발걸음 하나하나가 허세와 외로움이 뒤섞인 한국 중년 남자의 전형 같았다.
3. 코미디, 그 안에 숨겨진 풍자와 메시지
영화는 끝없이 웃긴 상황을 만들어낸다. 경찰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시민들은 서로 탓하며 책임을 미루고,
개인의 욕망은 사소한 정의감보다 우선시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은근히 스며든다.
지하철 안에서 생기는 갈등은 개인 간의 거리감과 무관심을 말한다.
성실하게 일하려는 사람의 외침이 무시당하는 모습은,
누가 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경찰의 무능과 복잡한 절차 속에서 본질을 놓치는 구조는
당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이 영화는 결코 진지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말도 안 되는 사건들 속에 관객을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슬쩍슬쩍 현실을 비춘다. 그래서 더 웃기고, 그래서 더 씁쓸하다.
4. 단순한 이야기, 그러나 완벽한 구성
처음부터 끝까지 ‘라이터 하나’라는 단 하나의 맥거핀만으로 이렇게까지 촘촘한 플롯을 이끌어낸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각 인물의 행동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은 점점 복잡해지지만, 결국 모든 실마리는 병구의 담배 한 대로 귀결된다.
이 영화는 복잡한 구조 없이도 캐릭터 중심의 내러티브로 밀도 높은 유머를 만든다. 모든 장면이 다음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지루할 틈 없이 몰입감을 준다.
5. 지금 다시 보면 더 와닿는 장면들
20년 전 영화지만, 지금 다시 봐도 몇몇 장면은 유독 현대적이고, 묘하게 현실적이다.
예를 들어, 병구가 지하철 안에서 소리치는 장면. “왜 다들 말이 없어요? 이게 옳은 건가요?”
그 장면은 영화 속 허구 같지만, 실제로도 우리가 얼마나 침묵하는 데 익숙한지를 보여준다.
또 수험생 캐릭터가 “오늘 하루만 나 좀 혼자 있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던 순간. 그 짧은 대사에, 청춘의 무력감과 외로움이 압축돼 있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코미디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현실의 조각을 꺼내 보여준다.
6. 결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병구는 결국 자신의 하루를 되돌아보며 ‘그래도 살아는 봐야지’ 하는 표정을 짓는다.
사실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라이터는 여전히 없고, 사람들은 여전히 제 갈 길을 간다.
하지만 병구는 그 하루를 통해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따뜻하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도 그렇지 않은가. 별일 없이 흘러가지만, 그 안엔 작고 미세한 깨달음들이 있다.
우리를 ‘조금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마무리: 웃고 떠들다가, 나를 돌아보게 되는 영화
‘라이터를 켜라’는 웃기지만 유치하지 않고, 가볍지만 결코 얕지 않다.
그저 라이터 하나 찾는 이야기인데, 그 속엔 사회와 인간과 삶에 대한 은근한 통찰이 있다.
20년 전 영화지만, 지금 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라이터 하나 때문에 인생이 꼬일 수도 있고, 그걸 붙잡고 하루를 통째로 소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하루가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는 그 안에서 ‘무엇을 느꼈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웃음 너머, 삶을 가볍게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말한다. “라이터를 켜라. 그냥 웃긴 영화 아니야. 진짜 한번 봐봐.”